[중앙SUNDAY] “무인도보다 무서운 이 땅에서 살려면, 나만의 섬이 있어야죠” 2017.01.15 [2017 스포츠 오디세이] 무인도 탐험가&사막 마라토너 윤승철씨 “사막과 무인도의 공통점은 적막함이다.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한,나와 자연만이 마주하고 있는 그 적막감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윤승철(29)씨는 무인도 탐험가다. 그는 지난해 『무인도에 갈 때 당신이 가져가야 할 것』 (달 출판사)을 펴냈다. 그는 사막과 극지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토너이기도 하다. 그는 23세에 4대 극지 마라톤(사하라·고비·아타카마·남극)을 완주해 세계 최연소 극지 마라톤 그랜드 슬램 기록도 갖고 있다. 사막과 무인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욕심을 내려놔야 한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사하라에 도전했을 때 배낭 무게가 13.5kg이었다. 첫날 오버페이스를 한 뒤 거의 실신해 쓰레기통 옆에 쓰러졌다. 그런데 선수들이 뭘 자꾸 버리는 거다. 멀쩡한 식량들이었다. 나도 일주일 레이스를 위해 준비한 식량 4㎏을 버렸다. 심지어 배낭 끈까지 잘라 무게를 줄였다. 무인도에서는 노끈 하나, 휴지 한 장도 아쉽다. 내가 얼마나 헤프게 살았는지를 반성하고, 감사하게 된다.” 울산에서 자란 윤승철씨는 중학생 때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게다가 심한 평발이어서 뛰는 건 물론이고 걷는 것도 싫어했다.그러다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사막 마라톤 사진에 꽂혔다. 그 후 해병대를 다녀오고 3년을 준비해 사막 마라톤 출발점에 서게 됐다. 6박7일간 250㎞, 자비 없는 폭염과 새벽의 칼추위,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맨몸으로 헤쳐나왔다. 승철씨를 만난 곳은 서해안 태안의 신두리해수욕장. 국내에서 가장 큰 사구(모래언덕)가 있는, 그의 말대로 “사막과 무인도 느낌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사막과 무인도로 떠나는 건 중독인가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게 두렵고 멀게만 느껴진 적이 있었다. 한번 해 보니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또는 뭔가를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때 찾는 곳이 무인도다. 중독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막 마라톤 초기에 미션이 엄청나게 많았다던데 “부모님 몰래 서울의 단칸방을 뺐는데도 돈이 모자랐다. 소셜 펀딩을 받으면서 후원자들에게 한 가지씩 해 주기로 약속했다. ‘꼭 버리고 싶은 것 사막에 묻어주기’ ‘유리병에 사하라 모래 담아오기’ 등 다양했다. 300명 넘게 동참해 주시는 바람에 미션도 300개를 넘었다. 완주하는 것도 힘든데 미션 수행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웃음)” 사막 마라톤 완주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인가 “맞다. 다른 나라 참가자는 컨디션이 조금만 나쁘면 레이스를 미련 없이 중단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진통제 먹고 완주한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다. 그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 아닌가 싶다. 한국인 특유의 정(情)도 큰 몫을 한다. 처지는 사람에게 ‘힘내라’ 말 한 마디, 물 한 모금이라도 주는 게 한국인이다. 그런 호의를 받고서 ‘신세를 갚아야 한다’ ‘이렇게 도와주는데도 중간에 포기하면 날 뭘로 볼까’ 하는 체면의식도 작용하는 것 같다. 사막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복합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무인도 체험 SNS 올렸더니 동참 늘어 동국대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연마한 윤승철씨는 사막 마라톤 얘기를 묶은 『달리는 청춘의 시(詩)』 (이야기나무)를 2013년에 펴냈다. 그러곤 무인도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 국내에 흩뿌려진 무인도를 찾아나섰다. 가 보니 쓰레기와 자갈밭 천지였다. 고기 잡는 건 어족자원 보호, 나무 꺾어 불 피우는 건 산림법 위반이라 금지였다. 그래서 필리핀 팔라완 섬 인근 무인도에서 친동생과 3주 정도 살다 왔다. 그곳에서 겪은 일들과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댓글 수백 개가 달렸다. ‘나도 가고 싶다’는 내용이 많았다. 별 생각 없이 ‘다음달에 또 갈 거니까 생각 있는 분은 공항으로 나오시라’고 답글을 했더니 16명이 공항에 나타났다. 이게 ‘이카루스 무인도 탐험대’의 시초였다. 지난해 10월까지 매달 3박4일의 일정을 진행했다. 18기까지 진행된 이카루스 탐험대는 ‘기수별’로 지금도 어울리고 있다. 아무런 사고도 없었지만 혹시 사고가 나면 인솔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법적인 문제 등을 정리할 때까지 당분간 필리핀의 지인에게 맡겨뒀다. 윤씨는 ‘섬청년탐사대’도 운영하고 있다. 외딴 섬 중에는 기력이 쇠한 어르신들만 살고 있어서 조류에 떠내려 온 쓰레기들을 방치한 곳이 많았다. 섬 체험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을 묶어 청소,이발,마을잔치,영정사진 촬영 등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주 수입원은 기업체ㆍ학교 등의 특강료다. 서울 원룸에서 딱 혼자 살 만큼 번다. 1950만원짜리 중고차는 5년 할부로 샀다. 그는 “무인도 관련 일은 당장은 돈이 안 되지만 앞으로는 될 것 같다. 대학원(지리학)에 가려는 것도 먹고 살기 위한 보험 차원이다. 사막,무인도를 다니지만 발 딛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고 했다. 본인은 무인도 갈 때 뭘 가져갈 건가 “시집, 편지지 뭉치와 펜이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각을 적고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손편지를 쓸 거다.” 가져가면(데려가면) 안 되는 건 “사람이다. 데려가 보니까 더 느낀다. 처음에야 내가 불 피우는 동안 누구는 사냥을 하고, 이렇게 분업이 된다. 근데 정말 무인도에 산다면 내면의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올 거다. 생선 한 마리를 잡아도 누가 맛있는 쪽 먹을 거냐로 다툼이 생기지 않겠나.” 무인도 가는 게 현실 도피 아니냐는 말도 들을 텐데. 촛불집회는 가 봤나 “촛불집회 10번 중에 6번 참가했다. 광화문광장 근처에 차를 댔다가 주차위반 딱지를 떼이기도 했다. ‘무인도가 그렇게 좋으면 거기 살지’ 소리 들으면 좀 슬퍼진다. 난 현실적인 사람이라 여행도 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오래 있지도 못하고, 오래 있는 게 쉬운 것도 아니다.” 무인도에 있으면 문명이 그리워지나 “휴대폰이 절대 터지지 않는 곳인데도 처음에는 진동이 오는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평온이 찾아오지만 또 불안해진다. 섬에선 서울을, 도시에선 무인도를 그리워한다.”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나 “사막보다 더 척박하고 무인도보다 더 무서운 게 우리 사회다. 처절한 생존경쟁을 하고 무자비한 속도에 떠밀려 다니는 이곳이 더 무섭고 힘들다.” 불씨 살려두려면 확 덤벼들지 말라 인터뷰 하기 전에 그의 책 두 권을 사서 통독했다. 밑줄 쳤던 부분을 다시 읽어주고 작가의 생각을 물었다. ‘다 먹은 새구이의 뼈를 버리러 바다에 갔다가 아직 눈감지 못한 잘린 새의 목을 봤다. 손질을 하면서 바다에 던진 것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 멀쩡한 생명을 잡아먹고 있나 하는 허무감,반성,죄책감을 표현한 거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각을 위해 생명을 죽이고 있지 않나. 치킨을 시켜먹고 계란을 까 먹을 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지점을 본 거다.” 거북이 알도 먹었다면서 “바다거북이가 알을 낳고 갔는데 아침에 산에서 커다란 도마뱀이 내려와 알을 먹고 있는 거다. 쫓아야 하나 자연의 섭리니까 놔둬야 하나 고민하다 너무 많이 먹는다 싶어 쫓아보냈다. 알 두 개를 집어서 마치 신이 된 양 하나는 삶고 하나는 프라이를 해 먹었다. 거북이 알은 탁구공과 크기?모양이 흡사하다. 아무리 오래 삶아도 노른자는 안 익더라.” 불씨를 살려놓는 요령을 쓴 것도 재미있다 “7시간 동안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만든 적이 있다. 그렇게 얻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면 바람길을 만들고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 불씨가 보인다고 바람을 세게 불면 꺼져버린다. 조금씩 불어주면 지속적으로 오래 간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가면 좋은데 급한 마음에 확 다가가면 휙 꺼진다. 불씨를 살피면서 연애의 기술도 배울 수 있다. 하하.” ‘지초도의 해변엔 나뒹구는 냉장고 하나가 있다’고 했다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냉장고처럼, 많은 어른들이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셨다. 목사님도, 큰 부자도, 고관대작도 고민 없는 사람이 없더라. 그러면서 다들 무인도를 소망한다. ‘거기 가면 좀 나아질까’라면서.” 20대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다. 20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신문을 보니 20대의 92%가 ‘대통령 선거에 꼭 참여하겠다’고 하더라. 그 전에 그만큼 투표를 안 한 건 신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자기 기준과 신념이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20대에 그걸 정립해야 하고, 그걸 위해 나만의 무인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인터뷰를 한 곳은 신두리해수욕장 인근 읍내의 호프집이었다. 주인도 손님도 없었고, 한 시간 넘게 누구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정현종 시인의 ‘섬’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원문보기정영재기자